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참모총장|장군참모장]]에서 [[야전군사령관|야전사령관]]으로 ===== 루마니아가 참전을 선언한지 2달이 지난 [[11월 15일]], 콘라트는 황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쇤브룬 궁전을 방문하여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콘라트는 전쟁 상황을 브리핑하였으나 황제는 도중에 몇번 졸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고, 노쇠함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콘라트를 격려하였다. 그러나 나흘 후인 [[11월 21일]] 황제가 서거하였다. 콘라트는 황제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슬픔을 느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죽음은 콘라트의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종말이라는 사형 선고와 다름 없었다. 그로부터 또 나흘 뒤인 [[11월 25일]],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원수(계급)|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로 진급시킨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탄생 이후로 비(非)합스부르크 가(家) 군인으로서는 47년만이며, 현역 군인으로 서는 57년만의 첫 승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1월 26일]],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도 콘라트를 [[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계급)|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의 지휘봉을 수여하였다.[* 물론 이것은 명예직] 그러나 콘라트는 더이상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고 말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카를 1세는 콘라트의 권위를 축소할 계획이 명확해졌다. [[12월 2일]]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을 총사령관 대리로 강등시키고 [[카를 1세]] 본인이 총사령관에 오른다. 카를 1세가 자신을 수하에 두고 군권을 가져가려한다는 속셈을 콘라트는 알아챘다. 군권을 확보한 카를 1세는 내각과 군부를 개혁하려 시도하였다. 첫번째로 육군 최고 사령부(A.O.K.)의 본부를 테셴에서 [[바덴바이빈]]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황제가 총사령관으로서 사령부를 통치하기에 편리한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콘라트는 사령부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플레스에 있는 OHL 지부와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카를 1세의 결정에 항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독일 제국군에 대한 종속을 콘라트는 "필연"으로 받아 들였지만, 카를 1세는 오헝 제국군을 독일 제국군으로부터 자립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령부가 테셴에서 [[바덴바이빈]]으로 옮겨졌을때, 본부에서 여성의 존재를 금지했기 때문에 콘라트는 두번째 아내인 지나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콘라트는 정작 이 규칙이 카를 1세의 아내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치타 황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사생활에 잡음이 있었던 콘라트에게 참모장이 "[[자유사상|자유사상가]]"라는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같은 보수적인 국가에서 고위직에 적합하지 않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1917년]] [[1월 22일]], 콘라트는 제국의회에서 [[독일 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인의 참여를 지지하는 장관들에게 합류했다. 그는 5개월 전부터 이 작전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그 결정이 미국의 중립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장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세계대전에 대한 사회진화론 관점에서 그는 꽤 정확하게도 '앵글로색슨' 강대국인 미국이 전쟁에서 영국에게 적극적인 동맹국이 될 것라고 봤다. 콘라트는 미국을 [[삼국 협상]]에 조용히 침묵하는 파트너로 보았고 실제로도 이미 식량과 보급품의 공급자로서 협상국을 돕고 있었다. 미국이 단기적으로 [[서부전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콘라트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콘라트의 의견과 안톤 하우스 대제독의 의견이 일치했지만 카를 1세와 부리안의 후계자이자 헝가리 외무성 장관 오토카어 체르닌 백작, 이 둘만이 작전에 대해 심각한 불안감을 느꼈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에 콘라트는 [[카를 1세|카를 대공]]이 [[프란츠 페르디난트|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보다 훨씬 더 마음이 맞을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렇기에 [[카를 1세|카를 대공]]이 황제가 되었을 때 콘라트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섬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첫 몇 주 동안 콘라트는 콘라트는 자신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년 반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군참모장을 담당했고, 그의 판단에 제동을 걸수있는 건 오직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뿐이었다. 콘라트는 OHL에게 조차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었다. 그랬던 그에게 이 젊은 황제의 지휘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매일 [[카를 1세|카를 대공]]과 마찰을 일으켰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서른여덟번째 생일과 맞물려 2월 말에 두번째 방문[* 사령본부가 바덴으로 옮겨진 후 콘라트의 아내 지나는 허락없이 그를 거의 보러 갈 수 없었다.]을 했었던 당일에 몇시간 후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이 콘라트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프리드리히 대공]]은 [[카를 1세]]가 트렌티노 공세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씌워서 콘라트를 해임하고 새로운 장군참모장을 임명하기로 결정했음을 콘라트에게 알렸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콘라트에게 제10군과 제11군으로 구성된 쥐트티롤 집단군(Heeresgruppe Südtirol)[* 콘라트의 이름을 따서 콘라트 집단군(Heeresgruppe Conrad) 혹은 요제프 대공 집단군(Heeresgruppe Erzherzog Joseph)이라고도 불린다.]의 [[야전군사령관|야전사령관]]이 되어 계속 현역으로 복무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나는 모든 전선에서 전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남편이 지금 현역에서 은퇴한다면 이후에 일어날 일로 남편의 명성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콘라트는 그런 그녀의 추리에 납득했다. 그리하여 황제 제안을 거절하고 현역에서 그대로 퇴역하길 원했다. [[2월 28일]] 그날 저녁에 AOK 본부에서 열린 비공개 브리핑에서 카를 1세는 자신의 제복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떼서 콘라트에게 달아주며 설득하였고, 결국 콘라트는 이를 받아들였다. 지나는 남편이 결정을 재고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현역 복무 연장 소식에 크게 실망하였다. [[3월 1일]]에 콘라트는 장군참모장에서 해임되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후, 콘라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https://de.wikipedia.org/wiki/Oskar_Regele|오스카어 레겔레]](Oskar Regele, 1890-1969)는 그의 해임을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라스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한 결정에 비유했다. 콘라트는 그의 총사령관과 잘 지낼 수 없었고 주요 정치인들의 신뢰도 잃었다.] [[3월 2일]],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콘라트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공식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렇게 콘라트는 [[이탈리아 전선]]만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라트로서는 좌천이나 다름없는 인사이동이었다. 콘라트는 중간에 1년동안 육군 감찰관에 있었던 시절을 제외하고 [[1906년]]부터 [[1917년]]까지 총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장군참모장에 재직했었다. 반강제로 그 자리에 앉게 된 콘라트는 장군참모장에 생각이 딱히 없었기에 감찰관 시절때도 마지못해 장군참모부에 돌아와야했다. 콘라트는 전략가가 아닌 전술가로 명성을 얻었고, [[야전군사령관|야전사령관]]으로서 전선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본부에서 펜대나 굴려야 했던 참모 업무에 대해선 애정과 열정이 거의 없었다. [[1914년]] 러시아 전선에서의 첫 패배와 그의 아들 헤르베르트의 죽음으로 그는 망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에 패배한 후 신경쇠약을 겪고 직위를 잃은 그의 동맹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몰트케]]와는 달리 콘라트는 계속 복무했다. 콘라트가 장군참모장이 아니더라도 콘라트가 전쟁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때에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생도들 중 49명이 1917년에 [[장성급 장교|장성]]이 되어있었다. 그들은 콘라트의 사상을 따르며 군의 최상부 계급까지 도달하여 콘라트 밑에서 복무했다. 부대 사령관이나 참모부에서 콘라트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렇게 콘라트에게 깊이 빠져 있는 제자들이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오래 지배하고 있었고, 완전히 콘라트의 군대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옛 군주가 살아있는 동안 콘라트는 사실상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직위을 유지했다. 그가 더 이상 당면한 일에 대한 마음이나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를 1세의 장군참모장 해임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늦은 편이었다. 콘라트는 무려 31개월동안 조국의 군대를 지휘했으며, 이 기간 동안에 이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은 참모총장을 교체한 상태였다.] 콘라트의 후임으로는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로 결정되었다. 콘라트는 아르투어에 대해 부대 사령관으로서는 좋은 인물로 고려는 했었지만 장군참모장으로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아르투어도 콘라트가 누렸던 권한을 가질수 없을 것이었다. 콘라트와 그의 보좌관인 루돌프 쿤드만(Rudolf Kundmann, 1869-1934), 나머지 부관들을 포함하여 장군참모의 많은 부하들이 직위를 잃었다. 특히 여기에는 콘라트가 AOK의 부사령관이자 자신의 후계자로 간주했던 [[요제프 메츠거]] [[소장(계급)|소장]][* 그의 군사적 능력이 매우 유능한 것을 비롯해서 콘라트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콘라트(AOK)와 팔켄하인(OHL) 간의 분쟁을 중간에서 자주 조정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 휘하의 장교로서는 이례적으로 독일 [[장성급 장교|장성]]들이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했다. 후에 메츠거는 [[카포레토 전투]]에서 제1보병사단을 지휘한 공로로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십자훈장을 받으며 대외적으로도 유능한 부대 사령관임을 입증했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콘라트 집단군은 제10군과 제11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제10군사령관으로는 전쟁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폰 크로바틴]] [[상급대장]]이, 제11군사령관으로는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병과대장|보병대장]]이 맡았고 둘다 콘라트의 지휘를 받았다. 그의 오래된 심복인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이 제10군 소속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들어오게 되었다. 참모장 쿤드만도 제1군단사령관으로 콘라트 집단군에 합류하였다. 집단군 사령부는 [[볼차노|보젠]]에 위치하였다. 그는 AOK에서 벗어나 "모의의 둥지, 개성, 아첨꾼들한테서 벗어나게 되어 기쁘다"고 털어놓았다. 콘라트 집단군의 사령부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그는 제4카이저 연대를 시찰하기 위해 폭설 속을 썰매를 타고 전선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진짜 군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고, 전선을 자주 둘러보았다. 차남 에르빈이 티롤에 주둔하고 장남 쿠르트가 스위스 근처에서 요양하는 것은 콘라트의 심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티롤에서 동부전선으로 이동한 에곤과 연락이 끊긴것이 콘라트의 유일한 걱정이었다. 봄이 시작되면서 콘라트가 쥐트티롤 방면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였을 때 이탈리아군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증오와 공격적인 전투촉구는 이미 알고있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공세의 주요 전선이 이손초 강을 건너기보다는 알프스에서 내려오기를 기대했다. 콘라트는 공세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카를 1세의 AOK가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병력을 이탈리아 전선에 재배치하기 시작했을 때. 조용히, 점차적으로,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을 보로에비치 집단군을 보강하기 위해 다음 공격이 시작될 이손초 강으로 파견하였고, 콘라트는 황제가 자신을 정교한 전략적 속임수의 볼모로 사용하기 위해 콘라트 집단군 사령부에 배치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낙담하였다. 다행히 [[1917년]] 3월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 덕분에 러시아 전선에서 비교적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된 콘라트는 동부전선의 부대들을 이손초와 트렌티노 전선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군의 사기는 저하되어 있었고, 비(非) 독일계 병사들은 전쟁을 지속할 의욕 자체를 잃은 상태였다. 팔켄하인의 뒤를 이어 독일군 장군참모장이 된 루덴도르프는 이탈리아군이 열두 번째 공세에 나설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붕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콘라트에게 대규모 지원 부대를 파견했다. 이 때, 파견된 부대에는 [[에르빈 롬멜]] 소위도 배속되어 있었다.[* 롬멜 소위는 뷔르템베르크 산악대대의 중대장으로 [[카포레토 전투|제12차 이손초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1917년 여름, 콘라트의 축소된 집단군이 벌인 가장 큰 전투는 방어전이었다. [[6월 9일]]부터 [[6월 29일]]까지 20여일 동안 벌어진 몬테 오르티가라 전투에서 그의 43개 대대는 165개 대대로 구성된 이탈리아 제6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2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걸 제외하면 콘라트는 다른 전선에서 이손초의 10번째 전투(5월-6월)와 11번째 전투(8월-9월)가 일어나는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7월]]에 러시아 임시정부가 동부 갈리시아에 이른바 "[[케렌스키 공세]]"를 개시했지만, 초기 침투는 전년도의 "브루실로프 공세"와 일치하지 않았고, 제국군의 역공은 러시아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동맹국]]의 군대는 동쪽으로 멀리 진격했고, 러시아와 루마니아는 모두 전쟁에서 패퇴하였다. [[8월]], 독일의 지원과 중포병이 제한된 상태에서 이손초 강을 따라 자체적인 공격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줄 심산으로 [[카를 1세]]는 [[빌헬름 2세]]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부대들을 동부전선에서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다. 동부에서의 전투가 서서히 끝나감에 따라, 이탈리아 전선보다 거의 3배나 많은 동부전선의 합스부르크 사단을 계속해서 그곳에 주둔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OHL 또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체면을 구긴 승리 이후, 카를 1세에게 동부전선을 유지할 동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작전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이탈리아 전선에 포병대와 함께 7개 보병 사단을 보냈다. 전투를 위해 편성된 독일 제국군은 명칭에도 불구하고, 15개 사단 중 9개 사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었다. 새로 편성된 오스트리아-독일 혼성 제14군을 [[오토 폰 벨로]] 사령관이 이끌고 [[1917년]] [[10월 24일]], 이손초 강 상류의 카포레토(오늘날의 [[슬로베니아]] 코바리드) 마을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카포레토를 공격한다는 생각은 원래 [[독일 제국군]]의 생각이 아니었다. 몇 년 전, [[1908년]] 장군참모부의 전적지답사에서 콘라트는 카포레토에서 북쪽으로 7마일 떨어진 플리츠(보비)와 하류로 8마일 떨어진 톨메인(톨민) 사이의 공격 계획을 스케치했었는데, 여기서 이손초 강 가로질러서 돌파헤서 카포레토를 공격하는것에 이점이 있다는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1917년]] [[1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것을 기억해낸 콘라트는 이 계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카를 1세가 이탈리아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요청하기 전까지 이 계획을 보류하기로 하였었다. 그리고 이 콘라트의 작전 계획을 상정해뒀다.] 오토 폰 벨로 장군은 콘라트의 작전에 기반하여 전투를 지휘했다. 콘라트의 계획대로 진행되던 끝에 마침내 혼성 14군은 [[카포레토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동맹국은 총 7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탈리아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전사자 4만 명, 부상자수도 3만 명에 이르렀고 무려 29만 4,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 밖에 탈영병의 수도 수천 명에 달했다. 장비 손실 역시 엄청났다. 3,000문 이상의 야포와 3,000정 이상의 기관총, 거의 2,000문에 달하는 박격포와 엄청난 양의 탄약 및 장비를 잃었다. 20마일 너비의 이탈리아 전선에 구멍을 뚫어 전선 전체를 붕괴시켰다. 이탈리아 전선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직전까지 가며 큰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공세는 2주 동안 계속되었고, 이탈리아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으로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기 전인 [[11월 7일]] 피아베 강에 도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이제 독일 제국군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향후 11개월 동안 피아베 방어선을 유지할 예정이었고, [[11월 30일]]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서부전선]]에 병력을 보강을 하기 위해 벨로의 독일 제국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혼란을 이용하기 위해, 콘라트는 [[11월 9일]] 티롤에서 공세를 시작했으나 그의 부대가 전진하기에는 아직 약했다. 루덴도르프는 콘라트 집단군을 강화하기 위해 보로예비치에게 피아베 전선에서 서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것을 호소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5일]]까지 콘라트의 군대는 바사노(Bassano)에서 12마일 이내로 진격하여 작년 티롤 공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마지막으로 점령했던 멜레타 산을 재차 점령했다. 이후 카를 1세가 제국 의회를 다시 소집한 후, 콘라트는 큰 관심을 가지고 양원의 절차를 따랐다. 그는 자신의 기록과 전 테셴 AOK의 기록에 비판적인 연설을 한 레온 폰 빌린스키[* 원래 콘래트의 "전쟁 정당"의 일원이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시류에서 벗어났다.] 전 재무장관의 상원 연설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콘라트는 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발동하고 전선에 있어서 제국 의회에 직접 참석하지못하는 현 상황을 고려하여 구 AOK의 유산으로 러시아 군대의 붕괴와 "폴란드의 해방"을 주장했으며, 둘 다 "동맹국인 독일과 긴밀히 협력한 노력"에서 달성했다는 공식적인 반박을 전보로 보냈다. 얼마 후 개인적인 큰 비극이 콘라트의 우울함을 심화시켰다. 스위스의 아로자에서 요양중이던 콘라트의 장남 쿠르트의 수행원들은 쿠르트가 "강한 향수병"을 보여주었고 봄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복귀하기를 희망했다는 말을 보고했다. 쿠르트의 상태는 죽기 5일 전에 더 악화되었지만, 그의 의사들은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콘라트에게 알리지 않았다. [[1918년]] [[1월 10일]]에 그는 전쟁의 대부분 동안 그를 활동하지 못하게 했던 폐 질환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하필이면 그날이 그의 31번째 생일이었다. 그 소식은 3일 후 [[빈(오스트리아)|빈]]을 방문하고 [[볼차노|보젠]]으로 돌아온 콘라트에게 전해졌다. 콘라트는 [[1월 18일]] 장례식을 위해 [[볼차노|보젠]]에서 [[빈(오스트리아)|빈]]으로 가는 야간 열차를 탔고, 그 후 티롤로 돌아가는 야간 열차를 탔습니다. 콘라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쿠르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 소식이 무섭게 나를 놀라게 했다"고 인정했다. 그 소식은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왔고, 3년전 콘라트가 지휘하는 작전에서 전사했던 삼남 헤르베르트의 죽음만큼 더 심각했다. 헤르베르트는 콘라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고 둘은 좋은 부자관계였다. 그가 죽은 후 콘라트는 그를 끔찍하게 그리워했고, 아무에게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책임감과 고통을 느꼈다. 대조적으로, 콘라트와 쿠르트의 관계는 장남이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이후 계속 폭풍이 몰아쳤다. 물론 사이가 결코 소원해진 적은 없었지만, 전시 회복 기간 동안 쿠르트에 의해 쓰여진 개인적인 회고록은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이해하거나 감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쿠르트는 부자의 의견 차이를 진정으로 화해하기 전에 죽었다. 콘라트는 지나에게 이러한 감정들을 털어놓았지만 정작 그의 아들들과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쿠르트의 죽음 이후, 콘라트의 사회진화론 미사어구는 더 종말론적이 되었고, [[1916년]]의 패배 이후 그가 채택한 독일 민족주의 정서에 더 큰 징후를 보여주었다. [[1918년]] [[2월]], 전직 참모 장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콘라트는 전쟁을 "독일의 존재를 위한 투쟁"이라고 묘사했다. 콘라트는 또한 오스트리아의 독일 국민 연합(Deutschnationalen Verein)과도 관계를 맺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9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야전 원수들 중 콘라트만이 그러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것은 다국적 이익 공동체("Interessenstaat")로서 이중 군주제의 실행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의 정치적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그의 전쟁 전 관점에서 엄청난 변화를 나타낸 것이었다. 실제로, 한 때 콘라트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을 자기가 증오하는 이탈리아 민족 통일당원들처럼 동일하게 가혹한 용어로 비판했었다. 게다가 [[볼차노|보젠]]에 있는 동안 그는 매우 흥미롭게 러시아의 소식을 관찰하며 유럽은 이제 아무도 예언할 수 없는 종말과 함께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접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콘라트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물결"에 매우 두려움을 느꼈고 유럽을 휩쓸지 않기를 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